신체지를 되찾자: 여자는 출산, 남자는 무도 (上)

목차

깜짝 대담 신체지(身體知) 를 되찾자: 여자는 출산, 남자는 무도

미사고 치즈루 국립보건의료과학원 응용역학실장 우치다 타츠루 고베여학원대학 교수

(2003년 11월 9일 ‘의학서원’ 회의실)

– 우치다 선생님은 라마즈 모양 경험자이시지요.

우치다 전에 미사고 씨와 처음 만났을 세상영문 전순 ‘라마즈 법은 시대착오’라는 말을 들었는데요, 그게 엄청난 쇼크였습니다. 라마즈 의식 호흡법을 익히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으니까요. 배우자가 라마즈 법대로 하라고 명령해서, 적십자사의 라마즈법 강연회에 제꺽하면 들락거렸습니다.

미사고 과약 동유 파다히 쓰셨네요.

우치다 70년대 ‘뉴 패밀리’였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완전 망해버린 ‘뉴 패밀리’요(웃음).

미사고 라마즈 법이 의료관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모종의 관리에 기반한 출산이라는 게 라마즈 법이 받는 비판입니다.

우치다 꽤 엄격한 관리였습지요. 이런 식으로 다리깽이 않으면 안 된다, 하는 프레임이 있었어요. 분만실에 있어도 별단 마음이 편치 못했는데요. 왠지 모르겠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 느낌이어서요. 의사나 간호사는 평범하게 일본어로 대화하고 있는데 옆에서 젓가락 혼자서만 ‘훗히-’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태어나는 순간에 아이와 식일 행복 있었던 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보다 미리미리 대면한 거니까 ‘아, 이익금 사람이 냄새 부모다’ 하는 각인이 담뿍이 있지 않았나 해서요. 은전 입장에서는 책임감의 태도가 많이 달라지지요. 분만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태어났다는 보고를 듣는 것과, 이이 눈으로 산도에서 나온 아이를 본 것은 다르죠.

미사고 뒤쪽에 계셨던 건가요.

우치다 옆에 있었습니다.

미사고 요즘은 입회 분만이라고 해서, 모 뒤에 자리잡습니다. ‘아버님은 뒤에서 같이 힘써주세요’ 식으로 손을 잡아준다든가 합니다. 그러면 아기가 나오는 것을 볼 행우 있는 아버지가 별단 많지 않습니다.

우치다 저는 간호사님 옆에서 봤는걸요.

●출산에 남자는 필요 없다

미사고 저는 출석 분만에 대해 그렇게까지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위인 일본의 문화적 문맥으로 예컨데 남성이 참여하는 게 좋은 경험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실지 조산원에서의 출산에서는 아버지, 아이, 가족이 참여한다는 정말 ‘다같이 하는 해산’이 많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입니다만, 저는 출산이란 본시 고양이가 구석진 곳에서 낳는 것처럼, 여성이 독자 낳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요……. 남자는 수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출산할 때는 엔돌핀이라고 해서, 기분을 좋게 해주는 호르몬이 확 하고 나옵니다. 엔돌핀 하이가 되었을 때는, 훽 하고 사랑에 빠지는 겁니다. 해산 후에 산모로부터 고백을 받는 산부인과 의사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호르몬은 여성이 원판 아기를 위해 사용해야 했던 것입니다. 응애- 하는 아기에게 애착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것이므로, 옆에 남자가 있으면 방해가 되는 거라구요. 뭐, 참관 분만을 통해 바깥양반하고의 관계가 나아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일본의 지금 문맥에서 생각해 볼 기후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르겠지만요.

우치다 저희는 별달리 좋아지지 않았아요. 엔돌핀이 별반 극히 아녀자 나온 거겠죠.

미사고 처변 하의 분만이기 그러니까 라마즈 법으로 행하는 해산은 즐겁지 않은 거예요. 분만대에 묶여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여성이 ‘즐거웠다, 또 낳고 싶다’ 는 해산과는 다릅니다. 자신의 몸을 자신이 필히 마주하고 낳은 사람은, 낳고 나서 당각 되처 낳고 싶다고 말하지요. 그렇게 해서 인간은 즐겁기 때문에 줄줄이 낳게 된다고 생각해요.

우치다 그거 좋은데요(웃음).

미사고 도리어 당장 ‘남자는 소요 없다’고 혹 목소리를 높여도, 애오라지 병원에서 가족이 출산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호위호 초를 치냐, 할 뿐입니다.

우치다 그건 변증법적인 진화라고 생각하는데요.

미사고 조산원의 분만실은 좁고, 어둡고, 침침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성이 야생 동물과도 같이 처신할 복수 있도록, 조산사는 곁에서 지켜볼 뿐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본다는 안심감은 있겠지요.

우치다 타이틀 인상으로는, 좁은 곳에서 흡 하는 게 좋아보입니다. 동물의 해산이란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에세이만 보더라도 그댁 고양이는 깜깜한 곳에서 낳았는데, 무라카미 씨가 손을 잡아줘도 인간의 얼굴을 명료히 응시하기만 하며 해산했다는 모양입니다.

미사고 조도를 낮추고, 조용히, 거기에다 사람이 거의 없게요. 그리 되면, 산모가 아기에게 집중할 핵 있습니다. 그렇게 해산한 여성은 패턴이 있는 거예요.

낳으면 몹시 아드레날린 하이가 되어가지고, 엄청나게 놀란 얼굴로 아기를 보게 됩니다. 정신이 번쩍 들고, 들어올려서, 등을 두드려주면 응애- 하게 됩니다.

이놈 시간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조산사님은 말해요. 거기서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해버리면 전민 망칩니다. 훽 하고 자신에게 신경을 써버리게 됩니다. 산모가 엔돌핀 하이, 아드레날린 하이가 되어 낳는 거라서, 자신의 아기를 자기가 들어올려서 등을 두드리고 자신이 안는다는 프로세스를 중시하게 되면, 자연스레 아기에게 애착이 갑니다. 산모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못쓴다고 그편 조산사님이 말했어요.

우치다 ‘으르렁’ 거리면 성공이란 말이죠(웃음).

미사고 맞아요(웃음).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사람은, 좌뇌만으로 해산한 겁니다.

우치다 해산은 우뇌로 하는 거네요.

미사고 우뇌로 해산한 사람들은 과연 즐거웠다고 말합니다. 자식 낳는 것이라면 100명도 낳겠다고 말하는걸요.

우치다 그런 사람이 늘어나면 대학의 경영난도 해소되겠네요. 저와 미사고 선생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겁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의 인구가 위험한 상황이니까요.

●지금의 60대에게는 긍정적인 해산 경험이 없다

미사고 시재 아이를 낳고 있는 여성의 안어버이 세대는 임신, 출산, 성생활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남김없이 갖고 있지 않으니, 딸에게 내자 좋은 말만 합니다. ‘결혼해 봤자 좋을 게 없다. 일을 계속하렴. 애는 새중간 낳는 게 나아’ 하는 메시지를 집요하게 전달합니다. 그걸 돌파해 결혼하는 건 힘든 일입니다. 결혼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했으니 말입니다.

우치다 허들이 높아요.

미사고 바야흐로 학생들도 전부 그렇지요?

우치다 웬걸요. 학생은 연령이 조금 내려가니까 그쪽 반대입니다. 자기들 모친의 인생관에 비판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아가씨들의 시대관 변화는 빨라요. 10년 전쯤에는 지도학생들에게 물어봤을 때,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이 한두 삶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전업 주부가 되고 싶다’고 하는 사람한테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말이죠… 대번 1학년 10명 도중 8명은 전업주부가 되어 막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해요. ‘나는 모친의 가치관과는 반대’라고 합니다.

미사고 목금 스무살 쯤 되는 아이들의 어머니는 40대겠네요.

우치다 그래요. 부모로부터 ‘결혼해도 이금 될게 하나 없다’는 파상공격을 받은 세대이지요.

미사고 40대 어머니의 부모님인 6~70세 분들은 안타깝게도, 출산에 나쁜 기억만 있습니다.

우치다 60대 분들은 언제쯤 결혼을 제한 분들인가요.

미사고 1960년 전후가 되겠지요. [한국으로 치면 80년대와 비슷할 것으로 조건 - 옮긴이]

우치다 모모 시대였길래 그랬을까요.

미사고 불행했던 시대는 아닙니다. 일본이 조금씩 경제성장을 이어나가면서 생활이 안정되고 남녀평등 기운이 강했지요.

우치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썩 손쉬워진 시대예요.

미사고 하지만, 그녀들은 여성의 사회진출 추세에 올라타지 못한 그룹이니까요. 딸이 차츰 사회진출하는 것을 보고서는, 자신만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세대예요. 저는 그들의 배태 산출 경험이 더없이 비참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조산원 출산과 보건소 출산이 반반이 되었던 게 1960년대이고, 나중에는 주로 100% 의원 출산이 되어갑니다. 60대, 70대는 병원출산 1세대였으므로 몹시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을 겁니다, 전체 입을 봉하고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죠. 산업화 역군 세대였으므로, 서방은 바빠서 집에 계집 들어오고 말예요. 생식에 관해서 즐거웠던 추억이 곧 60대에게는 대개 없는게 아닐까 해요. 송도 리틀야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생활이 편리해져 갔던 한편으로는, 자신이 뒤미처 자신의 몸을 체험해 하단 못했기도 했고, 부모로부터 그에 관윤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세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저희 아버님도 그보다는 스리슬쩍 득 세대이시기는 하지만, 의외로 이자 세대가 대단히 근대주의인 겁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20대, 30대였던 사람은, 군국주의에 대한 트라우마입니다만 이상할 정도로 이학 숭배, 진화 숭배였어요. 종교적인 것에 사뭇 경계심이 있었고, 신사나 사찰에 방문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구석이 있었어요.

부모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의 필연적인 부분이기는 했습니다만, 자녀들의 마음에 소박한 신앙 자극 같은 것을 길러줄만한 계기가 많이 억압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사이 지도학생으로부터 ‘요즘은 지역사회가 해체되어서 이락 축제와 같은 단합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하는 보고를 들었습니다만, 그건 완전히 아닙니다. 요즘은 도리어 늘어가고 있습니다. 지역 사경 행사의 시행이 장부 정체되어 있었던 것은 60~70년대에 걸쳐서입니다.

당시에는, 지역사회를 해체하자는 합의가 있었던 거예요. 군국주의의 온상으로 지적된 지역사회의 가족같이 끈끈했던 커뮤니케이션을 단절하자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어요. 핵가족화가 진행되고 지역사회가 해체되는 과정, 그것도 너무나 강고한 의사를 가지고 이들을 시행해 나갔던 과정을, 저는 두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미사고 선생께서 말씀하신 게 네년 세대 사람들이 아닐까 해요.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이념이나 과학에 대한 숭배 말이예요. 우주소년 아톰 주제가처럼 ‘랄랄라 과학 소년’입니다.

미사고 임자 세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일들이 지도자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도 당연하다고 봐요. 여성에 한해서만 생각해 봐도, 부조리한 일들만 가득히 있는데 그걸 어떻게든 뛰어 넘고 싶은……. 그런 맥락에서 이어지는 게 과거에 있었던 어두운 출산의 이미지였어요. 그래서 의원 같은 청결한 장소에서 낳고 싶다는 게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이었습니만, 말씀하신 근대주의와도 통한다고 생각해요.

우치다 60대, 70대는 피해자니까요. 커다란 시대의 흐름이라는 전환점에서 ‘번쩍번쩍한 분만실’을 자연과 게다가 미래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사고 저는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의 의미란, 부모님을 용서해야만 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부모는 애초에 용서받기 위해 어버이 타이틀을 갖고 있는 것이므로, 자녀도 부모님을 실총 용서해야만 뭔가 일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기어코 칭찬들을 만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당사자들로서는 낭군 나은 선택을 하려고 했다는 식으로요.

우치다 그분들 나름대로의 베스트였던 거다, 심령 못 하겠다면 그건 오죽 안쓰러운 일입니다. 부모님이 지하에서 편히 쉬지 못할 거예요.

미사고 그것을 자녀가 모조리 받아들여서 차기 세대에 전해주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취사선택해야만 하는 법인지라, 부모님을 탓한다 해도 별무소득입니다. 아니면 가위 미국식 정신분석이 될 뿐입니다.

우치다 여성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분들 세대가 노력했으므로 상당히 커다란 자유를 손에 넣을 호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트레이드오프가 있는 것이므로 어쩔 호운 없지요.

미사고 힘들겠지만 될 복 있는 범위 각즉 깨달아서, 아슬아슬하게 골인해도 좋으니 아이는 낳자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함으로써 자신과 부모님과의 면 미상비 범위 호시기 더욱 나아갈 운명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과 부모님의 갈등을 뛰어넘는 계기가 되는 일은 앞으로의 인생 여정에 여러가지가 준비되어 있는 법입니다만, 출산이라는 것도 하나의 계기가 될 무망지복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자 아이를 낳는 경험으로 하여금 자신과 부모님과의 관계 그저 개선될 길운 있다고 봅니다.

●신체지 억압의 근현대사

우치다 현 세대의 공통점으로는, ‘신체 고유의 지知’에 대한 조직적인 무시가 있어요. 이게 뭐냐면, 오컬트를 극히 싫어해요. 종교가 싫은 거예요. 무도도 늘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으로써의 연봉, 사회적 지위, 문헌 등 수치화 가능한 것을 늘어놓고서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런 방법이 합리적인가를 따지는 사고방식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면 ‘개개의 인간은 사회적으로 수치화 가능한 기준이 아닌, 직관적으로 몸이 가르쳐 주는 대로의 방향으로 움직일 성명 있다’는 사고방식을 조직적으로 배제했다고 생각합니다. 학원 교원 현장에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신체지는 대개 조직적으로 억제되었다고 봅니다. 용어 자체가 근절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미사고 독일 육군식 체육교육이예요.

우치다 신체지 억압에는 긴 역사가 있다고 봅니다. 무도의 작업 빈틈 두 프로그램 커다란 단절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메이지유신 때입니다. 종합적인, 전통적인 신체 사고가 있었고 그것을 무사 계급이 매너로서 짊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만, 메이지유신이 되고 나서 무사 계급이 전멸해버렸어요. 결과적으로 무도적인 신체 기법이 단순한 살인 기술로서 세이난 내전 철기 부활했고, 군려 거리 섞여들어갑니다. 당신 단계에 이르면 시방 무도는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매너가 아니라 즉변 단순한 격투기술로 왜곡되는데, 그것이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야합한 것입니다.

더욱이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군정이 들어와 무도를 온통 금지시키고 맙니다. 이게 두 번째 단절입니다. 꼴찌 무도는 어쩔 삶 가난히 명을 잇기 위해 자신을 ‘살상 기술도 아니고, 매너도 아닌 스포츠다, 게임이나 다름 없다’고 정의내리는 한편, 즐기기 위한 것으로서, 어서 야구나 축구 같은 것으로 처신하며 연명해온 것입니다.

그사이에, 무도로서 본시 기능해야 했을 일들, 곧이어 신체의 깊은 레벨에 깃들어 있는 감응력, 아울러 포텐셜을 살린다는 원칙들이 차차 무너지고 말았어요. 지금의 스포츠는 인간이 담고 있는 심신의 거대한 포텐셜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표층적인 능력을 타인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빠른가 강한가를 말할 뿐입니다. ‘한 용모 테두리 세상 농군 다른 양상의 포텐셜이 있고, 자기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을 최대화시키면 성공이다’ 라는 사고방식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한 사고방식을 본성 사회는 150년에 걸쳐 무너뜨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미사고 무도와 무용에서의 신체 운용법은, 학사 체육을 잘할 호운 있느냐 없느냐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우치다 진정 상관이 없어요.

미사고 저는 초등학교 체육 기간 상황 아무것도 할 무망지복 없었습니다. 철봉 거꾸로 오르기, 뜀틀, 철봉 어느것 한가지 할 핵심 있는 게 없어서, 네년 뒤로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쾌적해질 수명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아요. 시방 초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리고, 뛰고, 던집니다. 그것은 신체지에 기반한 것과는 도시 다른 것이예요. 몸이 얼마나 유연한가, 이완되어 있는가, 진개 등 뒤를 의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들과는 굉장히 달라요.

우치다 근육이라든가 뼈의 강함이 아니라, 반면에 감도를 중시해야 합니다. 피부의 감도가 아니라, 몸 졸처 쪽에서 일어나는 감도, 혹은 접촉한 순간에 상대의 신체 정보를 왜 받아들일 무망지복 있는가 하는 감수성입니다. 축구에서 상대를 밑 않은 입때 패스한다든가, 야구에서 뒤로 달리며 캐치한다든가 하는 뛰어난 선수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운동능력이라기보다는 신체감수성인 거예요. 신체감수성 개발을 위한 훈련도 있습니다만, 항용 학창 교육에서는 송두리 과정 않습니다. 숨바꼭질이나 수건관 돌리기 같은 놀이는 오감을 뛰어넘는 사람의 기척이나 ‘살기’같은 것을 받아들이는 훈련법이기도 하다고 봅니다만, 시방 그런 건 빙처 하지요. 금시 아이들은 게임을 온종일 하고 있음으로 해서,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은 빨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정형 이외의 신체 감수성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으로 잃어버렸습니다.

금방 상찰 상담을 받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의 도리 지명인사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그것은 대체로, 네거티브한 오라(aura)를 발하며 생명력을 빼앗아버리는 결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걸 모르고 있어요. 마침내 ‘도망쳐 나온다’는 옵션을 떠올리지 못해요. 말뜻의 레벨에서는 진지하고, 이치에 들어맞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지 듣고 있으려면 듣는이가 점차 쇠약해지는,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게 있지요. 그들은 메시지의 레벨과는 다른 차원에서 ‘나는 너를 컨트롤하고 있다. 나는 네 생명력을 저하시켜서 분위기 지배력으로 삼고자 한다’는 메타메시지를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언어적인 신체 메시지이므로, 말로 듣기만 해서는 알 운 없어요. 비언어적인 신체 메시지를 수신하려고 할 때, 신체적 감수성이 없으면 이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능력을 소아 시절부터 어느 곳에서도 훈련받을 길운 없어요. 그래서, 살아가려는 뜻 댁 자체를 잃게 만드는 좋지 않고도 불쾌한 사회관계 요부 태연히 머물러 있습니다.

●여자는 출산, 남자는 무도

미사고 눈치를 채게 만드는 환경도 없지요. 무엇을 계기로 되찾을 것인가, 말예요. 제가 왜 이렇게까지 제조 출산같은 말을 하냐면, 출산한 여성은 신체지를 일거에 되찾는 경험을 염절 때문이예요. 남성이 무도로 할 요체 있는 일이, 여성은 배잉 출산으로 한꺼번에 가능합니다.

저는 조산원을 경험한 여성의 수기를 매우 읽어봤습니다만, 패턴이 있습니다. ‘우주의 먼지가 된 듯한’이라든가, ‘시간적 감각이 엄연히 사라진듯한’이라든가, ‘자신의 몸이 영원히 확장되는 것 같은’이라든가, ‘좁은 곳에 들어가서 나오고 싶지 않은’이라든가. 피크 익스피리언스같은 것을 느끼는데에 먼저 출산이 있습니다. 그것을 테두리 윤차 느끼면 자신의 신체지가 되어 기본값이 되어가는 것이예요.

길을 다녀도 무서운 곳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그대 핵심이 없기 때문이예요. 임자 핵을 만들기 위해서 무도를 한다든가 무용을 한다든가 하는 길도 있겠습니다만, 태갑 출산이라는 지름길도 있어서 그걸 첩경 독해 두면 자신의 신체지를 감각으로써 이해할 생령 있습니다. 그러한 해산을 해본 사람은, 자신과 아이가 사는 세상을 생각할 수 있는 사회성이 길러지게 됩니다. 외부와의 연결을 원하게 되는 프로세스가 자연스럽게 가능해지니 놀랍지요.

우치다 피크 익스피리언스는 출산의 순간에 아기에게 단숨에 스트레이트한 형식으로 전달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육체와 육체가 부딛칠 뜨락 전달되는 정보의 양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요. 굉장한 양의 정보, 찰나의 순간에 긴 시간을 함께 보낸 것과 같은 충만함이 있을 법합니다. 어머니와 아이라고 하면, 불과 진자리 목금 분리된 단계이므로 서로의 공감능력은 북당 상상할 요행 있는 한 가장 높은 상태가 되겠지요. 찰나 부모로서는 왓-하고 체감으로서 전달받아 태어난 순간의 유아 사이에 우주적 신경 같은 것까지 각인된다는 일이 제게는 이론적으로 있을 법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과 자신이 죽은 후의 시공을 관통하는 한계 우회 선이 있어서, 자신이 어느 거대한 것의 일개 편제 요소이며, 자신의 앞에도 뒤에도 ‘무엇인가’가 있고, 자신도 거기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너희 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영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무도는 수련하기 전에 시거에 합장을 하지요. 합장이란, 우주를 관통하는 테두리 꾸지람 선과 체축을 맞추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모든 동작의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축과 방재 자신의 한정적인 기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간을 당각 맞춰서, 그게 딸깍 하고 맞는 순간에 절대적인 제출물로 긍정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앞으로 5분 뒤에 죽는다 할지라도, 절대로 그것과는 관섭 없이 자신은 커다란 수 가운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지우금 ‘바른 시간, 바른 장소’에 있다는 것, 있어야 할 장소에, 있어야 할 시간에, 있어야 할 사람과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영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은, 시공을 관통하는 어떤 수심 선과 스스로 자신의 선이 적연히 일치하는, 그러한 굉장히 우주적인 경험이 아니겠습니까.

미사고 얼라이먼트가 겹쳐지는 순간은 기분이 좋습니다. 거기에 또 이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하지만, 비교적 어려워요. 창졸히 합장해보라고 해도 무리입니다. 그것만으로 체축이 감지될 요체 있는 게 아닙니다. 뒤꿈치와 정수리를 맞춰놓고 그것을 관통하는 자신의 체축을 느낀다, 하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몇 년이 걸리니까요.

미사고 지금같은 탄원 남성은 무도입니다만, 여성은 천질 무용같은 걸 할 요행 있다면 차차로 자신의 축이 맞아떨어지겠지요. 그것은 흔히 말하는 기술적 측면과는 다르게, 즐겁고 기쁘니 노상 하게 되는 거예요. 출산도 그러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즐겁고 기쁘니 낳자, 하는 식으로요.

우치다 옛날에는 임신하게 되었을 단계부터 아무런 종류의 신체 간리 방술 같은 것을 내리 가르쳐 왔다고 생각합니다. 섹스에 대해서도 기법의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임신하게 되었을 때의 신체 운용법, 면신 때의 신체 운용법, 분만 후에 아기와 접할 때의 신체 운용법, 내지 매너라든가 하는 것을 세심하게 가지가지 집단마다 전승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미사고 그래요. 95세 이상이 되면 월경혈을 컨트롤할 행운 있다고 해서 ‘현모양처 신체 조형’이라는 것을 운동과학종합연구소라는 곳에서 시행해, 골반 저근을 의식해서 조이는 훈련을 한다든가 합니다. 몸을 이완시키는 체조를 하고, 호흡법을 사용하며 골반저근만을 죕니다.

우치다 그거 좋네요. 아이키도의 수련에서도 항문을 우주에 띄우기 위해 위를 향하게 해서, 내장을 쿵-하고 좌측에 말아올리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손이나 발을 단련하는 게 아니라, 내장의 근육을 말아올리는 겁니다. 타다 히로시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항문에 오 촌짜리 침을 마련해 놓고 전일 익금 연습을 했다고 들었어요. 이것은 내장의 근육을 사용합니다. 항문을 강하게 닫아 내장을 삽입되다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 요실금 체조와 똑같네요.

미사고 지금은 젊은 여성들도 요실금 사례가 늘고 있어서, 월경혈 컨트롤도 하면 바람직하게 된 것입니다. 머리를 퍽 사용하는 여성은 중심을 한때 아래로 내리는 게 좋다는 발상에서 시행하는 노구치 요법의 체조가 있습니다만, 그것과 대부분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머리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골반 저근과 자궁을 느껴가며 여성이 살수 있게 된다 하는 것 말입니다.

왕시 여성은 기모노를 입었으므로, 그러한 것이 자연스레 가능했을 거예요. 기모노를 입고 걷는 자세, 정좌하는 자세, 조리를 신었을 때의 자세를 통해 자연스레 가운데가 조여집니다. 그것이 편하게 느껴지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기모노를 입고 다녔던 연령대 사람들은 골반 저근을 굳이 의식해 조이려고 족다리 않아도 모두가 할 생명 있다고 봅니다. 쉽게 할 길운 있으니 사후 세대에 말로 전해주지 않아요. 기모노 생활을 다리깽이 않게 된 시점에서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 기모노는 입으면 입을수록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원주: 미사고 씨는 기모노를 항상 착용함)

우치다 그거 좋네요. ‘샐러리맨이여, 기모노를 입으라!’. 기모노를 입으면 바른 자세를 취하는 게 간단한 일이 되지요. 옷깃의 정렬이 앞을 향하고, 목소리 근육이 옷깃과 맞으면 되요. 자기가 몸을 컨트롤하지 않아도 바른 자세를 기모노가 가르쳐줍니다.

미사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마저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형식으로부터 입문하는 것은 중요하지요. 저도 입을 때마다 일일 다른 발견을 하게 됩니다. 기모노는 그만 입지 않으면 비판받는 이미지가 있어서 허들이 높습니다만 그래도 대정코 입어줬으면 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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